이야기들/나한테만 중요한

낯선 남자에게서 너의 향기를 느꼈다능

라우렌시오 2013. 4. 30. 11:41

#1

시험기간.

답안지와 시험지를 나눠주고 똑바로 열심히 꼼꼼히 하라 호령한 뒤

잠시나마 멍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나서 한손에는 만년도장, 뒷주머니에는 답안지 꿰차고 한바퀴 휘이 돌며 학생 한명당 두개씩, 혹은 하나씩

꼬옥 눌러 도장을 찍는다.

 

#2

1학기 중간고사니까 괜찮다.

기말고사때는 이것도 꽤나 중노동이다.

한바퀴 돌고나면 이마며 목줄기에 땀이 송골송골

때로는 셔츠나 남방이 젖기도 한다.

 

#3

행차를 마친 뒤 교탁에 서 두리번거리는데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비죽비죽 웃는 그 녀석.

몇년전 우리반이었던 K와 닮았다.

 

#4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유독 닮아보이는 아이들을 보게된다.

그럴때면 어김없이

"너 형 있지?"

라고 묻는다.

헌데 내가 생각하는 그 녀석의 동생인 경우는 채 20%가 안되는 듯 하다.

그래서 졸업생들의 안부를 물을 기회가 자주 오지는 않는다.

오늘 그 녀석에게는 형이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성이 달랐다. 그녀석은 K, 이녀석은 L

 

#5

몇해전 K를 처음 만났을때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난 K네 형의 담임이기도 했다.

어쨌건 K를 만난건 한참 가오잡고 다니던 신규때의 일인데

급식실로 걸어가던 내게 장난을 걸고싶었던지 뒤에서 달려와 부딪히더라.

평소에는 장난도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그날따라 기분이 별로였다. 게다가 돌격의 세기가 상당해서 충격이 조금 컸다. 그리하여

'어쭈, 요놈봐라? 여기서 내가 웃고 넘어가면 우스워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벼락같이 혼을 냈다.

낄낄대며 주변에 서있던 아이들의 자세가 모조리 프리킥 차려는 베컴 앞의 수비수들과 같아졌음은 물론이다.

얼굴빛이 어두워진 녀석들을 뒤로한 채 스스로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쾅 찍으며 가던 길을 가고난 뒤,

그때부터 오늘 그 녀석에게서 보았던 K의 웃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6

한참이 지나 K가 한학년 진급하고 더이상 그의 공식적인 담임이 아니었을 때에

내게 말을 걸어오더라.

그때 선생님이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불같이 화를 내서 서운했다고. 무서웠다고.

나 역시 오래전부터 K가 나를 멀리하고 있음을 느낀 터라 그랬었냐고, 너무 심하게 화낸거 미안했다고 사과를 했지만

그 전과 같아지기는 어려웠다.

나는 예전처럼 먼저 장난을 걸지 않았고 

K는 어른과의, 혹은 교사와의 사이에 적당한 선 긋기를 시작한 듯 했다.

 

#7

큰 덩치에 까무잡잡한 피부, 잘 웃던 얼굴. 공부는 썩 잘하지 못했지만 참 착하고 밝았던 녀석.

갑자기 녀석이 보고싶어졌다.

알고보니 오늘 시험시간의 그 녀석은 연거푸 답안지 교체를 한 통에 다시 한번 바꿔달라는 말을 못하고 비죽이고 있던 것이었다.

재미있는 녀석.

답안지를 바꿔주니 또 웃는다. 어라? 요녀석봐라. 정말 닮았잖아.

"웃지마~ 정들어~"

또 웃는다. 진짜 잘 웃는 녀석이네. 보기 좋다.

덕분에 간덩이를 짓누르던 어제의 술기운이 날아갔다.

 

#8

정말정말 궁금하네.

다들 잘 살고 있나.

보고싶네.

그때 조금 더 잘해줄걸.

한번쯤 실실 웃으며 놀러와주면 참 좋을텐데.

보고싶다. 너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