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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나한테만 중요한

담배타령

by 라우렌시오 2011. 11. 11.

#1
십여전 전,
아니 그보다 꽤 전이구나.
괴담이 유포되었다. (아, 조중동 스타일의 전개)
매년 학교에서 받고 있는 흉부 X-RAY 검사의 목적이 흡연자를 가려내기 위함이며,
여기에서 낙인이 찍히면 수시로 불려가 처맞고 더맞고 또맞고 여튼 맞는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몇몇 현자들은 꽤 간단하며 그럴듯한 비책을 공개하여 그들을 구원 하였으니
바로 "우유"를 마시는 것이었다.


#2
X-RAY 검사 직전 우유를 마시면 폐 사진에 찍혀야 할 시커먼 타르 자국들이
하얗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끽연인들은 현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그들의 음성을 쫓아 거친 가시밭길을 지나
매점으로
매점으로
향했다.
검사 당일 매점에서는 흰 우유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남양유업과 매일유업이 부흥기를 누렸던 그 시절의 매점가는 길을 밀크로드 라고 불렀다(라고 소설을 써본다)


#3
평소 매일 한개씩의 우유를 사먹었던 나는
그날만큼은 우유를 사먹지 않았다.
그날 매점에서 우유를 사먹는 아이들은
암묵적 끽연자로 취급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의 시선을 무척이나 의식했던 소심하고 찌질했던 아이였다.


#4
모든 암호라는 것이 그러하듯
우리끼리 알고 있을때는 유용하지만
노출되었을때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의 비책이 선생님들의 정보망에 걸려든 것은 어느 꽃피던 봄이었다(고 전해진다).


#5
새 신을 신고 팔짝 뛰어보고픈 어느 화창한 날
흉부검사일 매점에서 우유 구매 이력이 있는 암묵적 흡연자들이 하나하나
교무실로 불려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하생략>


#6
대학 2학년때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
군대가기 직전이었구나.
그 뒤로 십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나는 아직도 담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주 피우지는 않지만
아직도 한잔술 뒤의 담배 한개비는 맛있다.


#7
며칠전에는 꽤 포근했는데도 불구하고
유난히 겨울 향기가 진했다.
겨울 향기가 진해지는 이 계절이면
색동옷 입고 두 손을 호호 불며 초소를 지키던 그때가 생각난다.
동기들과 피우는 담배 한개비로 그 겨울과 외로움을 견뎌내던 그때
살짝 그립기도 하구나.


#8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그 현자들은
우유회사 사장의 아들이거나
우유회사 사장의 손자이거나
우유회사로부터 고용되었거나
낙농진흥협회의 끄나풀 이었거나
매점 할머니의 손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소설을 조심스레 써본다

아,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다.